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건축가가 지은 최악의 집은 어떤 모습일까요? 그리고 그 건축가가 다시 지은 최고의 집은 무엇이 달랐을까요? 저는 집을 보러 다니면서 이 질문의 답을 뒤늦게 깨달았습니다. 처음엔 당연히 넓은 평수와 높은 층고, 커다란 창만 눈에 담았습니다. 하지만 작은 빌라 한 곳을 보고 나서 생각이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주방에 서면 거실이 한눈에 들어왔고, 창문 위치가 절묘해서 오후 햇살이 식탁 위로 정확히 떨어졌습니다. 누군가 이 집에서 사는 사람을 생각하며 설계했다는 느낌이 확 왔습니다.
르코르뷔지에가 부모님께 지은 첫 번째 집
근대건축의 거장 르코르뷔지에(Le Corbusier)는 스위스 지폐에까지 등장할 정도로 유럽에서 손꼽히는 건축가입니다. 여기서 르코르뷔지에란 본명이 샤를에두아르 잔느레인 스위스 출신 건축가로, '까마귀 같다'는 뜻의 별명으로 더 유명합니다. 그런 그가 부모님을 위해 지은 첫 번째 집은 역설적이게도 '세상에서 가장 못 지은 집'이라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1912년 스위스 라쇼드퐁에 지어진 이 집은 겉보기엔 멋있었습니다. 경사진 언덕 위에 배치된 총 120평 규모의 거대한 건물이었고, 지하부터 다락까지 4개 층으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동양풍 정자가 있는 정원과 아치형 입구, 과감한 타일 패턴까지 디자인적으로는 완벽해 보였습니다.
하지만 실제 거주자인 부모님 입장에서는 달랐습니다. 경사진 언덕을 한참 올라가야 현관에 도착할 수 있었고, 집 안팎에 계단이 너무 많았습니다. 나이 드신 분들이 매일 오르내리기엔 분명 무리였을 겁니다. 저도 김포에 단독주택을 지을 때 주변에서 "왜 굳이 불편하게 집을 짓느냐"는 말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는데, 그때는 그저 마당 하나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살아보니 계단 하나, 동선 하나가 얼마나 중요한지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건축주 중심 설계(User-Centered Design)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쉽게 말해 집을 사용할 사람의 생활 패턴과 신체 조건을 최우선으로 고려하는 설계 방식입니다. 첫 번째 집은 이 원칙에서 멀었습니다. 건축가의 예술적 야심은 충족했을지 몰라도, 정작 그 공간에서 살아갈 사람들의 불편함은 간과한 것이죠.
호숫가의 작은 집, 완벽한 휴먼스케일
르코르뷔지에는 이후 부모님을 위한 두 번째 집을 지었습니다. 1924년 스위스 브베 호숫가에 지어진 '호숫가의 작은 집(Villa Le Lac)'입니다. 첫 번째 집과는 모든 것이 달랐습니다.
가장 먼저 입지가 달랐습니다. 경사진 언덕이 아니라 호숫가 평지에 집을 배치했습니다. 계단을 많이 오르지 않아도 되는 구조였죠. 르코르뷔지에는 미리 설계 도면을 그려 주머니에 넣고 다니며 적합한 땅을 찾아다녔다고 합니다. 에메랄드빛 호수와 산이 한눈에 들어오는 풍경을 높은 곳이 아닌 바로 앞에서 바라볼 수 있도록 한 것입니다.
건물 규모도 극적으로 줄였습니다. 총면적은 60㎡ 남짓, 우리나라 평수로 환산하면 약 18평 정도입니다. 여기서 휴먼스케일(Human Scale)이란 사람의 신체 치수와 동작 반경에 맞춘 공간 설계를 의미합니다. 부모님 두 분이 사시기에 딱 맞는 크기로 설계한 것이죠. 마당도 너무 넓지 않아 관리하기 편했고, 순환하는 동선을 설계해 발걸음 수까지 계산했습니다.
제가 7년간 살았던 마당 있는 집도 비슷했습니다. 입주 첫 해 봄, 마당에 작은 텃밭을 만들었는데 상추 몇 포기와 방울토마토 한 줄이 전부였습니다. 거창하지 않았지만 아이들이 직접 따서 밥상에 올리던 그날의 표정은 아직도 선합니다. 관리가 번거롭다는 말도 틀린 건 아니지만, 그 번거로움보다 매일 아침 문을 열고 바깥공기를 먼저 마실 수 있다는 것이 훨씬 큰 일이었습니다.
건축주를 배려한 디테일의 힘
호숫가의 작은 집에는 건축주를 향한 세심한 배려가 곳곳에 숨어 있습니다. 필로티(Pilotis) 구조로 1층을 기둥으로 들어올려 통풍과 습기 문제를 해결했고, 파노라마 창을 길게 내어 호수 풍경을 액자처럼 담았습니다. 여기서 필로티란 건물 1층을 기둥만으로 지탱해 지면을 비워두는 구조를 말하는데, 근대건축 5원칙 중 하나로 손꼽힙니다.
천창(Skylight)을 통해 은은한 자연광이 실내로 퍼지도록 했고, 북쪽 창은 작게 내어 집중할 수 있는 서재 공간을 만들었습니다. 어머니의 취미인 제봉을 위한 맞춤 가구도 제작했고, 침실 천장에는 고창(High Window)을 설치해 누운 채로 하늘을 볼 수 있게 했습니다. 심지어 강아지가 밖을 내다볼 수 있는 작은 창까지 따로 만들었습니다.
옥상정원(Roof Garden)도 단순한 장식이 아니었습니다. 옥상에 흙과 식물을 배치해 여름엔 햇볕을 차단하고 겨울엔 단열 효과를 높이는 기능적 요소였습니다. 르코르뷔지에의 어머니는 이 집에서 34년간, 돌아가실 때까지 거주했습니다. 건축주가 평생을 머물렀다는 사실이 이 집의 완성도를 가장 잘 증명합니다.
저는 지금 이사를 준비하면서 여러 집을 보고 있습니다. 처음엔 부동산 앱을 열면 평수와 가격이 먼저 보였고, 자연스럽게 그 숫자로 집을 판단했습니다. 하지만 지난주 본 작은 빌라에서 깨달았습니다. 집을 나오면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는 지금껏 집의 스펙을 본 건지, 집에서의 내 하루를 상상한 건지. 넓이나 가격보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어떤 빛이 들어오는지, 저녁에 가족이 어디에 모이게 되는지를 먼저 생각했어야 했습니다.
좋은 집의 기준은 결국 건축주의 삶에 맞춰져 있는가입니다. 르코르뷔지에가 두 번째 집에서 보여준 것처럼, 크기가 아니라 내 몸에 꼭 맞는 집, 우리 가족 구성원에 딱 맞는 집이 가장 좋은 집입니다. 아기자기한 요소를 잘 설계하면 그것이 건축주가 최고로 만족할 수 있는 세상에서 가장 좋은 집이 될 수 있습니다. 집을 고를 때, 혹은 지을 때 이 원칙을 잊지 않으려 합니다.
참고: https://www.youtube.com/watch?v=CYDEJ0QolIc&list=PLdQzMgrYKIoMUgghMZAMxfI1bvtNhTyZx&index=4